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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Gaeddong-思惟

쿨리, 기회가 전혀 없다

쿨리

기회가 전혀 없다를 영어로 “He doesn't have a Chinaman's chance" 라고 표현한다.

쿨리는 머슴, 일꾼을 뜻하는 인도 힌디어‘kuli'에서 유래했다. 영어 ’coolie'이며, 해외에서 일하는 저임금 계약노동자를 뜻한다.

 

쿨리는 19세기 해외 각지로 돈벌러 간 청나라의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다. 청나라는 2차 아편전쟁(1857~1858)에서 패전한 후 중국인 노동자의 해외 송출을 공식 허용했다.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요구 사항이었다.

 

겉으로는 중국인에게 자유 이주권을 부여한 것 같지만, 실상은 노예 무역선에 저임금노동자를 태우기 위한 술책에 불과했다. 쿨리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흑인 노예 대신 일했다. 이들은 형식상으로는 노예가 아닌 계약노동자였다.

 

그러나 쿨리는 대부분 문맹이었고 극한의 불리한 조건 계약서 내용도 파악 못 한 채 서명했다. 노예 수송선으로 쓰였던 열악한 배에 실려 몇 달씩 항해해 목적지에 도착했다.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는데, 흑인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이었다. 탈출이나 반란을 시도하면 바로 총살이었다.

 

최초의 중국인 쿨리는 1806년 서인도제도에 속한 영국 식민지 트리니다드로 보내졌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1820년대 이후 송출됐다. 1848년 호주, 1849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도 쿨리를 수입했다. 초기 송출된 쿨리는 8할이 납치, 인신매매 등으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가난한 쿨리들은 멕시코, 페루,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쿠바 · 자메이카 등 카리브해, 미국과 캐나다 등 아메리카, 싱가포르 등 동남아, 남아프리카 · 호주 · 뉴질랜드 등 오세아니아,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현재 세계 각국에 화교차이나타운이 있는 이유다.

 

유럽 각국은 신대륙에 벌여 놓은 사탕수수, 면화 농장과 금광, 은광 광산의 일손이 부족해 아우성이었다.

1863, 미국에서도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으로 철도 건설과 농장에 필요한 노동력 부족이 심각했다. 유럽 농민들이 이주를 권장했지만, 백인 농민들은 주로 아르헨티나 같은 온화한 기후인 곳으로 갔다.

 

결국 중국인, 즉 쿨리가 대안이었다. 그들은 인내심이 있고 성실해 각지에서 선호했다.

1840년대에 흑인 노예가 해방된 쿠바에서는 1847~1870년 사이에 14만 명이 넘는 쿨리를 수입했다. 홍콩에서 쿠바의 아바나까지 4~5개월의 항해 도중 쿨리의 15%가 사망했다.

 

이 당시 세계적으로 최소 100만명 이상의 쿨 리가 공급되었고, 사망자 수도 수만에서 수십만 명 이상일 거라는 추측이다.

 

쿨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등 건설하였다. 미국 대륙횡단철도 착공(1865)등에 투입됐고, 숱하게 목숨을 잃었다. 서부의 철도 공사 중 최악의 난코스였던 시에라네바다산맥에 쿨 리가 투입됐고, 이런 암벽 사이에 구멍을 뚫고 화약을 넣는 위험한 발파 작업은 모두 쿨리 몫이었다. 이 공사에 투입된 쿨리 12000여명 가운데 4분의 1인 3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세계에 차이나타운이 산재하고 중국 놈들이 판치는 근본적 원인은 결국 서구열강 백인 놈들의 잔혹한 짓거리였던 것이군. 유럽 놈들과 미국 놈들, 너희가 키운 중공이니 너희가 처리해라.

저랬으니, 중국놈들이 지금 눈 하나 깜짝 않고 서구 놈들을 비웃으며 복수를 하고 있는 거지.

서양 놈들의 간악한 짓거리는 자손만대에 걸쳐 그 죄값를 받으리라.